인쇄 기사스크랩 [제478호]2006-09-22 00:00

[이은경] 마케팅 가든 홍보 부장
뉴욕에 관한 단상

이름만 들어도 순간 아득해지는 지명들이 있다. 뉴욕은 내게 그런 곳들 중에서도 그 떨림의 강도가 가장 센 곳이다. 수십 번이나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래 전부터 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연인에게 고백을 받고 싶었나 보다.

이번 뉴욕 여행을 위해서는 사실 아무런 준비도 못했다. 광각렌즈를 장착한 크고 무거운 수동 필름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가방엔 옷 몇 가지를 넣어 훌쩍 길을 나섰다. 재충전을 위한 여행도 아니고 기분 전환용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 어디도 아닌, 뉴욕에 날 두고 싶었다.

뉴욕에 도착한 첫 느낌은 마치 도도한 여인네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짝사랑을 했건만 나에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느낌. 도착하자마자 벌써 뉴욕에 또 오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느낌으로 여행을 계속했다.

나의 뉴욕기행은 타임스퀘어에서부터 시작됐다.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에 버스를 내리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대형 광고판들. 처음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꼭 갓 상경한 시골처녀처럼 어리둥절했다. 브로드웨이 42번가와 8번가 주변에 삼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타임스퀘어는 뉴욕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이다. 뉴욕에 왔으면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적어도 한 편이상 챙겨볼 것. 역시 본고장이라 보고 난 후 감동의 수준이 다르다.

뉴욕 타임즈의 본사가 이전해 오면서 이름이 타임스퀘어가 되었단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약간씩 흥분되지 않을까 싶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광고판들이 화려한 조명을 자랑하며, 대낮에도 강렬한 맨해튼의 햇빛을 받아 빌딩들마다 번쩍번쩍 빛난다.

뉴욕 방문이 처음이라면 먼저 시티투어용 빨간색 2층 버스를 타고 맨해튼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좋다. 편도 $2인 시내버스에 비해 1인당 $40나 하는 시티투어버스 요금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2-3시간 정도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투어를 한 후에는 본전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다. 다운타운, 업타운, 브루클린 등 세 가지 노선으로 나뉜다.

내가 탄 다운타운 루프는 맨해튼의 이름난 모든 빌딩과 관광지를 도는 코스여서 굉장히 유익했는데 가끔은 교차로의 신호등이 낮게 있어서 2층의 승객들이 종종 몸을 수그려야 하는 등 나름대로 잔재미도 있었다.

영화에서 본 그 장소엘 직접 가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들뜨는 일이다. <세렌디피티>라는 영화에서 새라와 조나단이 만나는 카페의 이름이 바로 East 60번 가에 위치한 세렌디피티다. 거기서 우아하게 영화 주인공들처럼 차 한 잔 마시려고 했으나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서 그냥 포기하고 나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캡쳐한다면 아마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에서 유람선을 탔을 때 일거다. 그라운드 제로를 거쳐 Pier 16에서 막 출발하려는 저녁 6시 출발편 Zephyr 크루즈를 잡아탔다. 대략 1시간 동안 선장의 나레이션과 함께 자유의 여신상을 포함한 맨해튼 남부를 쭉 도는 코스다. 표는 1인당 $20. 단 2만원가량의 돈으로 이렇게 대단한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짜릿한 일이다.

서서히 비치는 석양에 월가의 높은 빌딩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다가 감청색으로 변하다가 나중엔 까만 도화지에 화려한 불빛들만 남는다.

주변에서 누가 뉴욕에 여행 갈 계획이라면, 난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뮤지컬 한 편 이상 관람하기>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등 <미술관/박물관을 한 곳 이상 여유 있게 돌아보기>를 힘주어 추천하겠다. 그리고 16번 부두에서 출발하는 해질녘 유람선상에서의 그 완벽한 순간에 관해 들떠서 이야기 하게 될 것 같다. 조금이나마 친해진 그 도도한 도시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