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기사스크랩 [제941호]2016-06-13 09:25

[취재수첩] [광화문 연가] 권초롱 - 취재부 기자





“고마움은 바라지도 않는다. 신뢰만 할수 있게 해줘라!”
 

 
 
“이모, 아이스크림이랑 과자 주세요. 지금 엄마 없어서 돈은 내일 엄마가 드린대요.”


시골에서 자란 기자에게 외상(값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행위였다. 동네 슈퍼에서 기껏해야 1만 원도 되지 않는 물건을 사면서 값은 나중에 지불하는 것에 고맙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도시로 터전을 옮기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린 시절의 외상 심부름이 이제는 쉽게 할 수 없는 추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슈퍼 주인이 코흘리개 어린이를 믿고 돈을 받지 않은 채 물품을 판 건 아니었다. 그는 기자의 엄마와 유대관계를 맺었으며 둘 사이에는 수년간 쌓은 두터운 신뢰가 자리했다. 외상의 기본은 신뢰다. 기자는 외상 해 주는 슈퍼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이 없었을지언정 기자의 엄마는 슈퍼 주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기자가 여행업계 생리를 알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업계에선 외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거였다. 기자가 알고 있던 외상의 개념과 외상에 대한 처세가 너무도 달랐다는 점이 적잖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외상 해 준 슈퍼 주인이 돈을 받기가 어려운 곳, 갚겠다는 날짜에 제 때 갚지 않으면서 도리어 큰 소리를 내는 곳이 바로 업계다.


최근 공정위는 소셜커머스업체들의 대금결제 지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관련 불공정행위를 잡겠다고 밝힌 바 있다. 소셜커머스업체들은 납품업체들에 외상 형태로 물건을 가져다 팔고 대금은 판매 후 지불하고 있다. 업계의 모습과 데칼코마니다. 여행사는 랜드사의 상품을 가져다 팔면서 대금은 판매 후 지불한다. 랜드사에 외상한 물품을 여행사는 소셜커머스에 외상으로 납품해 준다. 황당한 구조다.


며칠 전 한 여행사 관계자와 인터뷰 도중 그는 소셜업체의 횡포를 핏대를 세워 말했다. 대금의 70%만 결제해주고 나머지 30%는 차일피일 미루는 업체가 있는가 하면 결제금액이 애매하게 차액이 발생하는 업체도 있었다. 소셜커머스 측에서 먼저 제안해 상품을 납품했는데 납품 과정에서도 소위 갑질을 해대더니 대금결제 시에는 갑질의 끝판왕을 보여줬다고 하소연했다.



랜드사 취재를 가도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모 여행사가 대금을 차일피일 미루고 대금결제를 해달라고 하면 타 랜드사 상품을 쓰겠다고 도리어 먼저 얼굴을 붉히며 화낸다는 씁쓸한 얘기는 어제 오늘이 아니다. 때문에 여행사가 경영난을 겪으면 랜드사는 도산하거나 도산 직전까지 가고 만다.


업계의 생리구조 자체가 대금결제를 후불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외상 해주는 업체와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